인간은 공포에 사로잡히면 이성이 어느 정도 마비가 되기에 정상적인 판단을 잘하지 못하게 된다. 11월 경의 우리 부부가 딱 그랬다. 계약 종료일은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는데 아직 계약이 진행되어 가는 집은 없었고, 어린아이를 안고 길바닥에 나앉을 수는 없었기에 필사적으로 월세 매물을 찾아보고 여기저기 모두 연락을 돌려보던 참이었다. 그 와중에 우리가 살던 집 바로 아래층에 104qm 집이 세입자를 찾기 시작했다.
월세가 2999유로인 것이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그냥 애를 키울 수 있는 넓은 평수의 집이기만 하면 독은 어떻게던 한국에서 끌어올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 되돌아보면 그때 절반 정도는 정신이 나가있었던 것 같다. 여하튼 바로 아래층이라 집을 보러 가는 것이 전혀 어렵지 않았는데, 가구가 다 갖추어져 있는 거실 포함 방 4개짜리 집이었다. 그 당시에는 정신이 어떻게 되었던지, 빈 집을 구해서 가구를 다 사서 집어넣으면 비싼 월세나 그게 그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방이 하나 비는 것은 한국에서 부모님이라던지 손님이 오셨을 때 활용할 수 있겠다고 계속해서 비싼 월세에 대한 합리화를 하고 있었다.
여느 집을 구할 때처럼 아내의 월급명세서와 나의 잔고증명서를 들이밀었고, 수입이 모자란 것 같지만 우리는 가진 돈이 있으니 의심스럽다면 1년치 월세를 선납할 수도 있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했다. 집주인 측에서도 같은 건물에 이미 살고 있던 사람이어서 그런지 믿음이 가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새로운 집을 구하기 직전까지 갔다.
그리고 집주인은 '보증금으로 6개월치 월세를 낸다면 너희에게 이 집을 줄게' 라고 이야기했다. 여기에서 번쩍 제정신이 들었는데, 첫 번째로 한국에서는 월세에 비해 보증금 액수가 큰 경우가 흔하지만 독일에서는 보증금이 보통 2개월치 월세이고, 3개월이 넘어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실제로 이 조건을 아내의 직장 동료가 듣더니 'It's crazy'라는 반응을 보였다.
두 번째로, 독일에서는 월세 계약이 끝나고 집을 나갈 때 보증금을 순순히 돌려받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 기본적으로 계약 종료 후에도 6개월을 집주인이 보증금을 합법적으로 가지고 있을 수 있고(사실 나름의 이유가 있다. 여기서는 전기나 수도세 정산을 월별로 하지 않고 연별로 하기 때문. 다음 정산까지는 보증금을 집주인이 들고 있어야 처리를 할 수 있다), 계약이 끝날 때는 집의 가구가 상했다던지, 비치된 접시를 깼다던지, 세입자가 나가고 퇴거청소를 업체 쪽에서 한다던지(오지게 비싸다), 보증금에서 까여나가는 항목이 정말 많다.
보증금 6개월치는 너무 가혹하다고 답변했더니, '1년치 월세도 선납이 가능하다고 하지 않았어? 근데 그걸 미리 다 받는 건 우리도 할 수 없고, 보증금 6개월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하는데?'라는 메일이 왔다. 독일 물정 잘 모르는 아시아인을 벗겨먹고 싶었을까.. 그 보증금을 건네는 순간 월세는 월세대로 내고 온갖 명목을 다 붙여서 보증금을 까먹겠다는 심보가 눈에 보이고 있었다. 우리도 집을 구하는데 눈이 멀어 이성이 약간 없어졌었지만, 이미 6개월치 월세를 요구한 그 순간부터 집주인 쪽도 정상적이지는 않았으니까.
결국 '지금도 월세를 선납하라고 하면 가능하지만, 보증금은 다른 문제다. 우리는 이런 식의 비정상적인 계약을 맺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라고 답장했고, 그것이 이 집주인과의 마지막 대화였다. 마지막으로 follow-up 했을 때는 월세를 2700유로로 내렸던데, 아마 주변 시세에 비해서 그렇게까지 비싼 월세는 아니어서 누군가는 세입자를 구했을 것 같다.
정신을 차리긴 했지만, 여전히 내년에는 어디서 살아야할 지가 불투명했다. 다시 하루에도 수십 번씩 지겨울 만큼 켜보던 Immobilienscout24 앱을 켰다. 겨울이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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